
발효 식품의 깊은 풍미는 미생물의 정교한 대사 작용에서 비롯됩니다. 미생물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새로운 향미 성분을 만들어내며, 이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즐겨온 감칠맛의 근원입니다.
맛의 본질은 미생물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즐기는 된장, 김치, 치즈, 와인, 요구르트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발효입니다. 발효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거나 변형시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인류의 식문화는 이 발효를 통해 깊은 풍미와 저장성을 얻어왔습니다. 단순히 음식이 ‘익는’ 과정이 아니라, 미생물이 음식을 ‘재창조’하는 화학적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생물은 당, 단백질,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삼으며, 그 부산물로 다양한 향미 물질을 생성합니다. 이 과정이 바로 맛의 비밀을 만드는 핵심입니다.
발효를 이끄는 주요 미생물의 역할
1. 젖산균
젖산균은 탄수화물을 분해해 젖산을 생성하는 대표적인 발효 미생물입니다. 김치, 요구르트, 치즈, 사워도우 빵 등에서 주요 역할을 하며, 식품의 산도를 조절하고 병원균의 증식을 억제합니다. 젖산균의 발효는 산미뿐 아니라 아미노산, 펩타이드, 방향족 화합물 등 풍미를 결정하는 다양한 대사산물을 만들어냅니다. Lactobacillus plantarum은 김치의 새콤한 맛을, Streptococcus thermophilus는 요구르트의 부드러운 질감을 형성합니다.
2. 효모
효모는 발효식품의 향과 질감을 만들어내는 핵심 미생물입니다. 당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전환하며 빵의 팽창과 술의 풍미를 담당합니다. 특히 Saccharomyces cerevisiae는 포도주, 맥주, 막걸리 발효의 주역으로, 알코올 발효와 함께 에스터, 고급 알코올, 유기산을 생성해 풍부한 향을 냅니다. 효모는 또한 글루탐산, 글리신 등 감칠맛 물질의 전구체를 생산하여 발효식품에 감칠맛을 더합니다.
3. 곰팡이
곰팡이는 단백질과 지방을 분해해 발효식품의 복합적인 맛을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Aspergillus oryzae는 된장, 간장, 청주 등 전통 발효식품의 핵심입니다. 이 균은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전분을 당으로 분해하며 감칠맛과 단맛이 조화된 깊은 풍미를 형성합니다. 서양에서도 곰팡이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Penicillium roqueforti는 블루치즈의 짙은 향을, Penicillium camemberti는 카망베르 치즈의 크리미한 질감을 만듭니다.
4. 초산균과 기타 미생물
초산균은 알코올을 산화시켜 초산을 만들어내며 식초, 콤부차, 발효 음료 등에서 상큼한 신맛을 담당합니다. 또한 일부 발효식품에서는 고초균이 단백질을 분해해 구수한 냄새와 점성을 형성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청국장입니다.
맛을 만드는 미생물의 생화학적 작용
1. 단백질 분해 – 감칠맛의 근원
미생물은 프로테아제 효소를 이용해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합니다. 이 중 글루탐산과 아스파르트산은 감칠맛을 느끼게 하는 주요 물질입니다. 된장과 치즈의 짙은 풍미는 바로 이 과정에서 비롯됩니다.
2. 당 발효 – 단맛과 향의 창조
당은 미생물의 주요 에너지원으로, 발효 과정에서 유기산과 알코올, 에스터로 전환됩니다. 특히 에스터는 과일향, 버터향, 꽃향기 등 다양한 향미를 만들어냅니다. 사과향을 내는 에틸아세테이트, 바나나향의 이소아밀아세테이트가 대표적입니다.
3. 지방 분해 – 고소함과 깊은 향
곰팡이와 효모는 지방을 분해해 단쇄지방산과 메틸케톤을 생성합니다. 이 물질들이 결합해 치즈나 버터의 고소하고 깊은 향을 형성합니다. 예를 들어 블루치즈의 강한 향은 Penicillium 속 곰팡이가 생성한 2-heptanone, 2-nonanone 등의 케톤류 때문입니다.
세계 각국의 발효 미생물이 만드는 맛
1. 한국 – 김치와 된장의 미생물 협주
김치는 젖산균이 주도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pH가 낮아지고 아미노산과 유기산이 축적됩니다. 된장은 Aspergillus oryzae가 분비하는 효소로 단백질과 전분이 분해되어 짠맛, 단맛, 감칠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집니다.
2. 일본 – 사케와 미소의 과학
사케는 누룩곰팡이가 전분을 당으로 바꾸고, 효모가 그 당을 알코올로 발효시키는 ‘병행 복발효’ 과정을 거칩니다. 이러한 복합 발효 덕분에 사케는 부드럽고 단맛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풍미를 지닙니다.
3. 유럽 – 치즈와 와인의 미생물 하모니
치즈는 젖산균과 곰팡이의 조합으로 만들어집니다. 발효 중 생성된 아미노산과 지방산이 숙성 과정에서 반응하여 깊은 향과 농후한 질감을 완성합니다. 와인은 효모와 젖산균의 연속 발효로 탄생하며, 포도즙의 당이 알코올로, 산이 젖산으로 변하면서 부드럽고 조화로운 맛을 만들어냅니다.
발효 미생물 연구의 현대적 진화
오늘날 과학자들은 미생물의 유전자와 대사경로를 해독하여 특정 향미 성분을 조절하거나 새롭게 창조하는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특정 균주를 조합해 저염 된장, 고단백 요거트, 저산 김치 등 맞춤형 발효식품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또한 AI와 유전체 분석 기술을 활용하여 발효 과정 중 미생물 간 상호작용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맛의 과학은 경험이 아닌 데이터로 관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미생물이 만든 맛, 인류의 문화가 되다
미생물은 단순한 식품 보조자가 아니라 인류의 식문화를 진화시킨 주역입니다. 그들의 대사 과정이 만들어낸 향과 맛은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결국 발효의 본질은 시간과 미생물이 함께 빚은 예술입니다. 미생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음식의 본질을 이해하는 일이며, 그 속에는 자연과 과학, 그리고 인간의 지혜가 공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