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산업은 극도의 정밀성과 기술집약적 특성이 요구되는 분야로, 소자 설계부터 제조, 후공정, 패키징에 이르기까지 수천 개 이상의 공정과 다양한 소재가 사용됩니다. 이 가운데 반도체 소재는 제품의 성능과 수율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수입 의존도가 높을 경우 국가 산업 전반에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인해 한국 반도체 산업은 큰 충격을 경험했으며, 이를 계기로 ‘소재 국산화’에 대한 사회적·정책적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반도체 소재는 고순도·고정밀·고내열성 등 기술장벽이 높아 단기간에 자립이 어려운 분야로 평가되지만, 최근 국내 기업과 연구기관의 기술 축적이 빠르게 진전되면서 국산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반도체 핵심 소재의 특성과 시장 구조, 국산화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앞으로의 전략 방향을 중심으로 분석합니다.
핵심 소재별 국산화 현황과 기술 수준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소재는 약 50~60종 이상이며, 세정제, 포토레지스트(PR), 식각가스, 증착가스, CMP 슬러리, 웨이퍼, 마스크, 박막재료, 절연막재료 등 다양합니다. 이 중 핵심 소재는 기술 집약적이고, 불순물 관리가 까다로워 글로벌 시장에서는 일부 기업이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국산화 논의가 활발한 주요 소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포토레지스트 (Photoresist)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회로를 형성할 때 빛을 이용해 원하는 패턴을 형성하는 감광재로, EUV(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는 특히 정밀도가 높아 일본 JSR, TOK, 미국 듀폰 등 소수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2019년 수출 규제 이후 한국은 EUV용 포토레지스트를 국산화하기 위해 SK머티리얼즈, 솔브레인, 동진쎄미켐 등이 연구개발에 착수했으며, 일부 제품은 삼성전자 등 국내 고객사에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상용화된 제품의 품질 안정성이나 공정 호환성 측면에서는 아직 글로벌 선두 기업과의 기술 격차가 존재합니다.
2. 고순도 불화수소 (HF)
고순도 불화수소는 반도체 식각 및 세정 공정에 필수적인 화학물질로, 일본 스텔라케미파가 글로벌 시장을 주도해 왔습니다. 국산화는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솔브레인, 이엔에프테크놀로지, 램테크놀로지 등 국내 기업이 고순도 불화수소 생산에 성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99.9999999%(9N) 이상의 순도를 확보한 일부 업체는 일본산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이 분야는 국산화가 가장 빠르게 실현된 사례로 꼽히며, 향후 대규모 양산과 안정적 품질 유지가 관건입니다.
3.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FPI)
FPI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모두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고기능성 폴리머 소재로, 내열성과 투명성이 뛰어나며, 접이식 디스플레이 등에도 사용됩니다. 국산화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되며, 코오롱인더스트리, SKC 등이 해당 소재의 개발 및 양산에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온·고압 환경에서도 성능 저하가 없어야 하는 특성상, 안정성 확보가 핵심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외에도 CMP 슬러리, 실리콘 웨이퍼, 실리콘 카바이드(SiC) 웨이퍼 등도 국내 기업들이 국산화에 착수한 소재군이며, 특히 차세대 전력반도체나 자동차용 반도체에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소재들입니다. 현재 일부 소재는 상용화 단계에 진입했으며, 정부의 국책과제와 연계해 연구개발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산화 추진의 기회와 도전 과제
반도체 소재 국산화는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산업 전략과 공급망 안보 차원에서 중요한 국가 과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중 기술 갈등, 일본 수출 규제, 대만해협 리스크 등 글로벌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자국 내 생산과 공급 체계 확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국산화 추진의 기회 요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국내 반도체 수요 기반이 매우 크다는 점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최대 메모리 공급업체로, 국내 공급사에 대한 테스트 및 양산 기회가 충분합니다. 둘째,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지원입니다. 소재·부품·장비 특별법 제정, 예비타당성 면제 사업, R&D 세액 공제, 기술 개발 보조금 등 다양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셋째, 국내 소재 기업들의 기술력 축적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출 규제 이후 4년간 다수의 중소·중견기업이 첨단 소재 시장에 진입해, 일부는 글로벌 고객사에 납품하는 단계까지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전 과제도 분명합니다. 첫째, 글로벌 톱티어 기업과의 기술 격차입니다. 반도체 소재는 수율, 공정 호환성, 신뢰성 측면에서 장기간의 테스트가 필요하며, 품질 편차가 미세하게라도 발생하면 대규모 수율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 국내 시장의 규모와 고객사 수가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미국, 일본, 유럽 기업들은 다양한 고객사를 대상으로 안정적인 피드백 루프를 갖추고 있으나,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외에는 대형 고객군이 제한되어 있어 기술 고도화에 시간이 더 소요될 수 있습니다. 셋째, 대규모 투자와 수요 예측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첨단 소재 개발에는 수년간의 연구비와 장비 투자가 필요하며, 양산화 이후에도 고객사의 공정 조건 변경에 따라 다시 제품을 조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난이도 핵심 소재에 대해선 국내 기업과 글로벌 기업 간 기술 제휴, 공동 개발, 전략적 지분 투자 등의 방식으로 기술 격차를 단축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소재 자립도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미래 전략과 정책 방향
반도체 소재 국산화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단기 대응을 넘어서 중장기 전략과 산업 생태계 조성이 필수적입니다. 단순히 일부 품목의 국산화를 넘어, 기술 축적, 장비 연동, 테스트 인프라, 인재 양성 등 종합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첫째, 기술 로드맵 기반의 연구개발 전략이 요구됩니다. 지금까지는 수출 규제 대응 중심의 단기 대응이 주를 이뤘다면, 앞으로는 5~10년을 내다본 기술 확보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가 전략기술로 반도체 소재 분야를 지정하고, 산학연이 공동으로 중장기 로드맵을 수립해야 합니다. 둘째, 중소·중견 소재 기업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 이전이 중요합니다. 현재 국산화를 선도하는 많은 기업들은 중견기업이며, 이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려면 기술 검증, 양산 테스트, 품질 인증 등 다층적인 지원 체계가 필요합니다. 대기업과의 상생 모델 구축, 공동 R&D 및 수요예측 시스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셋째, 테스트베드 및 평가 인프라 구축입니다. 반도체 소재는 제품을 만들었더라도 실증이 어려워 상용화가 지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 차원의 테스트 라인, 고객사 연계 실증 시설, 공정 시뮬레이션 환경 등을 조성하여 상용화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글로벌 협력도 병행해야 합니다. 완전한 자립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분야도 있는 만큼, 해외 선진 소재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기술도입, 공동 연구도 유연하게 추진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소재 개방형 생태계’ 모델을 통해 국내 소재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글로벌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도체 소재의 국산화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전략 과제입니다. 단기적인 위기 대응을 넘어, 중장기적인 기술 내재화와 생태계 확장 전략이 병행될 때, 국산화의 실질적인 성과와 글로벌 경쟁력 확보가 가능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