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산업은 고도의 정밀성과 기술 집약적 특성으로 인해, 핵심 소재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특히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개발한 고순도 화학소재, 포토레지스트, 실리콘 웨이퍼 등은 한국 반도체 제조사의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이후,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소재 국산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인 투자와 연구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 국내에서는 기술 장벽이 높았던 핵심 반도체 소재들을 자체 개발하거나 국산 대체재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며, 기술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체적으로 국산화에 성공한 주요 소재 사례들을 중심으로, 그 배경과 의미, 산업적 파급 효과를 상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고순도 불산(에칭가스) 국산화: 수입 규제 돌파의 상징
고순도 불산(HF, Hydrogen Fluoride)은 반도체 세정 공정에 사용되는 핵심 소재로, 웨이퍼 표면의 이물질 제거 및 식각 공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2019년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 규제를 단행하며, 고순도 불산의 수출을 제한하였습니다. 당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해당 소재의 90% 이상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공정 중단 가능성까지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국내 화학 기업들이 빠르게 국산화에 착수하였고, 솔브레인, 이엔에프테크놀로지, 후성 등 국내 소재 전문 기업들이 불산 정제 기술을 확보하면서 불과 6개월 만에 국산 고순도 불산 양산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솔브레인은 99.999% 이상의 고순도 불산을 개발하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공급하기 시작했고, 이는 일본산 불산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내 불산 제조 인프라, 안전관리 시스템, 생산 설비 투자가 동시에 이뤄졌으며, 수입에 의존하던 전략 소재를 자립화함으로써 공급망 리스크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불산 국산화는 단순한 소재 대체를 넘어, 위기 상황에서의 기술 독립과 민관 협력의 대표 사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개발: 차세대 기술 경쟁력 확보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는 반도체 회로 패턴을 형성할 때 사용되는 감광성 재료로, 특히 고해상도 회로 구현을 위한 필수 소재입니다. 7nm 이하 미세공정에서는 극자외선(EUV) 노광 기술이 적용되며, 이에 적합한 고성능 EUV용 포토레지스트가 필요합니다. 일본 수출 규제 당시 EUV 포토레지스트는 일본의 JSR, TOK 등 몇몇 업체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한국은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 소재 기업들과 협력하여 국산 포토레지스트 개발에 나섰으며, SK머티리얼즈(現 SK실트론), 동진쎄미켐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동진쎄미켐은 미국, 유럽의 기술 파트너들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EUV 포토레지스트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2021년부터 양산 라인에서 시험 적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품질 테스트를 거쳐 일부 양산 공정에 실제로 사용되며, 기술 안정성과 수율 측면에서도 수입 제품과 동등한 수준을 입증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정부 차원의 소재·부품·장비 R&D 지원과 규제 완화, 수요기업과 공급기업 간의 공동 기술 개발 시스템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EUV 포토레지스트의 국산화는 단지 대체 수단을 넘어서, 차세대 반도체 공정 기술을 국내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을 다진 사례로 평가됩니다.
실리콘 웨이퍼 및 블랭크 마스크의 국산화 확대
실리콘 웨이퍼는 반도체 칩이 형성되는 기본 기판으로, 소재의 순도와 평탄도, 결함 밀도가 공정 수율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은 과거 실리콘 웨이퍼의 상당 부분을 일본 SUMCO, 신에츠 등에서 수입해 왔지만, 최근에는 SK실트론이 자체 개발 및 생산 역량을 확장하며 국산화를 본격화했습니다. SK실트론은 고순도 실리콘 웨이퍼 제조 기술을 확보하고, 300mm 대구경 웨이퍼의 수율과 품질 안정성을 확보하여 국내외 반도체 제조사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전력 반도체용 SiC(실리콘카바이드) 웨이퍼 시장에도 진입하며, 차세대 소재 국산화에서도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반도체 노광 공정에 사용되는 블랭크 마스크(Blank Mask) 역시 국산화가 진전되고 있는 분야입니다. 블랭크 마스크는 포토마스크 제작의 원재료로, 그 투명도, 두께, 결함 제어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국내 기업인 원익머트리얼즈, 에스앤에스텍 등이 기술 개발에 집중하며, 일부 제품은 양산 공정에 적용되고 있으며, 글로벌 고객사로의 수출도 시작된 상태입니다. 이처럼 핵심 소재 분야에서 실리콘 웨이퍼, 블랭크 마스크까지 국산화가 확장되고 있다는 점은 단순한 위기 대응을 넘어, 국내 반도체 소재 생태계가 자체적인 성장 구조를 갖춰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도체 소재 국산화는 단기적인 위기 대응책이 아닌, 장기적인 기술 자립과 산업 안보의 전략적 과제입니다. 고순도 불산, EUV 포토레지스트, 실리콘 웨이퍼 등에서의 성공 사례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공급망 불안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생산체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특히 민관이 협력하여 기술 개발, 테스트, 양산 적용, 정부 정책이 유기적으로 맞물린 사례는 향후 다른 전략 품목의 국산화에도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은 AI 반도체, 3D 패키징, 전력반도체 등 차세대 기술에 대응하기 위한 소재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하며,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의 독립은 반도체 강국으로 가는 필수 관문입니다. 이와 함께 소재 기업과 팹 기업 간의 긴밀한 협력, 대학 및 연구소의 기초 기술 지원, 정부의 중장기 투자 정책이 삼위일체로 작동할 때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